현대사에 영향을 끼친 정치가, 군인

현대사에 영향(악영향 포함)을 끼친
국가원수 및 국가원수급 정치/군사지도자

출생년도순

레닌(1870), 처칠(1874), 이승만(1875), 김구(1876),  트로츠키(1879),
스탈린(1879), 맥아더(1880), 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 무솔리니(1883), 트루먼(1884),
장개석(1887), 히틀러(1889), 드골(1890), 아이젠하워(1890), 모택동(1893),
주은래(1898), 히로히토(1901), 등소평(1904), 김일성(1912), 박정희(1917)

레닌이 총애한 트로츠키와는 9살 차이.
트로츠키와 숙적이었던 스탈린은 동갑.
처칠과 스탈린은 5살 차이.
장개석과 모택동은 6살 차이.
모택동과 주은래는 5살 차이.
파시스트 동지였던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6살 차이.
이승만과 김구는 1살 차이.
이승만과 맥아더는 5살 차이.
김일성과 박정희도 5살 차이.

소설은 소설가 한 사람이 드라마틱하게 내용을 구성한 것인데 비해,
역사는 수많은 뛰어난 인물들이 실제 세상에서 만들어 놓은
소설보다 더 재밌는 사건과 이야기들의 묶음이죠.
어떻게 재미있지 않을 수가 있어요? ^^

역사에서의 시대구분

유럽에서는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라는 3개의 시대로 구분해 왔다.
현대(contemporoary)도 있지만 그것은 역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현실정치와 현실경제의 영역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 고대, 중세, 근대의 기점과 종점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문자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대략 BC 3200 ~ 3000년 무렵이니 그 때를 고대의 기점으로 볼 수 있다.
고대의 종말과 중세의 기점은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5세기말.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기점은 비잔틴제국이 몰락한 15세기말.
근대의 종말과 현대의 기점은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고대: BC 3000 – AD 500
  • 중세: 500 – 1500
  • 근대: 1500 – 1900
  • 현대: 1900 – 2000

유럽에서의 시대구분이 다른 지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어차피 시대구분이라는 것도 몇백년후에는 다시 바뀌게 될 것이고,
역사를 보는 시각도 변화할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의 역사에도 이 시대구분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명저 50] (36)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출처: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9/h2007091217400286330.htm
날짜: 2007/09/12

[우리 시대의 명저 50] <36>이기백의 ‘한국사신론’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으로 독창적 시대구분 식민사관으로 일그러진 한국사 곧추세우다
호족·문벌귀족·신흥사대부·사림 시대 등 16단계로 한국사 발전과정 체계화
항일·신민족주의·유물사관 비판적 수용

‘식민사관을 좌초시킨 우리 사학의 등대’.1967년에 출간된 이기백(李基白)의 <국사신론>(1976년 <한국사신론>으로 개정)은 출간과 동시에 당시 국사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책은 일제 어용학자들에 의해 반도성(半島性), 사대성(事大性), 정체성(停滯性) 등으로 폄하돼 온 일그러진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초판본 서문에서 “식민사관은 한국민족이 선천적 혹은 숙명적으로 당파적 민족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민족적 단결을 파괴해 독립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민족성이 역사적 산물이지 역사가 민족성의 산물은 아니다”라며 식민사관을 통렬히 비판했다.

고려대 민현구 교수는 “1960년대 들어 한국사학에 중요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지난날 일제 어용학자들의 그릇된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동시에 한국사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발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새로운 방향 제시는 해방 직후에 진출한 신세대 학자들이 주도했으며 그 결과로 얻어진 가장 값진 성과가 바로 <한국사신론>의 탄생이었다”고 평가한다.

1947년 출간된 이병도의 <국사대관>이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학계에서 바이블 격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한국사신론>은, <국사대관>이 넘지 못한 벽을 일거에 허무는 계기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식민지사학을 극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국사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 구체적인 작업은 시대구분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기백은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은 물론 고대 중세 근대라는 서구식 3분법으로는 한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국사의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이었다. 지배세력은 일정한 시기에 정치ㆍ사회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역사를 움직여 나간 역동적인 인간집단을 말하며, 민중의 이익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나 부르주아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라는 게 이기백의 설명이다.

그는 이에 따라 한국사의 발전과정을 ▦원시공동체 사회 ▦전제왕권의 성립 ▦호족의 시대 ▦문벌귀족의 사회 ▦신흥사대부의 등장 ▦사림세력의 등장 등 16단계로 체계화했다.

지배세력이 씨족국가에서 부족국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를 거치면서 소수 집단에서 벗어나 점차 사회의 중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자 독창적 발견이었다.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은 <한국사신론> 초판에서는 18단계, 1976년 개정판부터는 16단계로 정리했다.

이기백은 이런 사관에 따라 지배세력의 몰락과 쇠퇴과정보다는 새롭게 등장하는 세력에 초점을 두는 방식으로 한국사의 주체적ㆍ역동적 흐름을 읽어냈다.

그는 자신이 이같은 역사적 시각을 갖게 된 것에 대해 “농민운동가였던 선친(이찬갑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일제 하에서 역사와 언어마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선친의 당부를 들어온 그는 오산학교에 진학, 교사로 있던 함석헌의 <성서의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와 신채호의 <조선사 연구초>를 읽으면서 뚜렷한 역사관을 갖게 됐다.

일본 와세다대에 재학 중이던 1945년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곧바로 소련군 포로가 된 이기백은 한국인 포로수용소에서 동료들의 권유로 한국사를 강의하며, 신채호과 함석헌 등의 역사관을 토대로 개설서를 썼다. 이 필사본 개설서를 시작으로 그의 오랜 한국사 탐험이 시작된 것이다.

이기백은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1회로 졸업한 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1년 봄 교재용으로 <국사신론>을 펴낸다. 이 책이 바로 6년 뒤에 발간된 <한국사신론>의 모체다. <한국사신론>은 이후 개작을 거듭해 1976년에 개정판, 1990년에 신수판, 그리고 1992년 1월에 신수중판을 펴내면서 현재까지 35만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또 1970년 일본어로 처음 번역된 이래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말레이시아어 러시아어 등 6개 국어로 번역 출간돼 외국인들에게 한국사를 이해하는 필독서로 사랑을 받고 있다.

이기백은 생전에 자신의 역사관을 ‘인간 중심 사관’이라 표현하고 “역사발전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균등한 행복을 주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한국사신론>은 이런 사관에 바탕해 신채호의 항일사관, 함석헌의 기독교사관, 손진태ㆍ이인영의 신민족주의사관, 그리고 유물사관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수용ㆍ극복하고,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과 함께 하는 새로운 한국사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기백 연보

1924년 평북 정주 출생 41년 오산중학교 졸업 47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56년 서울대 강사 58년 이화여대 교수 63년 서강대 교수 67년 <국사신론> 출간 76년 <국사신론> 개정판 <한국사신론> 출간 85년 한림대 교수 90년 <한국사신론> 재개정판 출간 99년 이화여대 석좌교수 2004년 별세

▲저서

<고려병제사 연구>(1968) <신라사상사 연구>(1986) <고려귀족사회의 형성>(1990) 등 저서와 편ㆍ역서 30여 권, 논문 160여 편

자신에 엄격했던 ‘학같은 선비’… 역사학의 서강학파 일궈

2004년3월7일이기백 선생이 마지막으로 참석한’한국사 시민강좌’ 편집회의. 왼쪽부터 이기동(동국대) 민현구(고려대) 이태진(서울대) 교수와 이기백 선생, 유영익(연세대)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낫다.”

2004년 6월 2일 80세를 일기로 별세하기 직전까지도 이기백은 이렇게 말하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고 한다. 명저 <한국사신론>을 비롯해 <고려병제사 연구> <신라정치사회사 연구> <신라사상사 연구> <고려귀족사회의 형성> 등 신라ㆍ고려사 연구에서 그가 이룩한 혁혁한 연구성과는 이같은 열정의 산물이었다.

이기백의 제자들은 그를 ‘학(鶴) 같은 선비’로 기억한다. 언제나 묵향이 묻어나올 듯한 하얀 모시적삼을 입은 단아한 모습이 영원한 이기백의 상이다.

그는 작고 직전 병세가 급속히 나빠지자 직계가족 외에는 문병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을 보였다. 40여년을 대학에 몸담았으면서도 연구소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을 맡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는 논문을 쓸 때 애매모호한 말로써 얼버무리면 그것이 “속임수가 될 수 있다”고 늘 경계했다.

제자인 이기동 동국대 교수는 “선생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제자들에게는 관대했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정두희 서강대 교수는 “대학원 시절 세미나는 제자들이 선생님의 학설을 비판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뤄졌다”며 “선생님은 당신과 다른 견해라 하더라도 옳다고 생각되면 다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기백은 1963년 서강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22년간 후학을 양성하면서 전해종(동양사), 길현모차하순(서양사) 교수와 함께 ‘서강학파’라는 학맥을 일궜다. 하지만 정작 그는 ‘학파’니 ‘인맥’이니 해서 세속적 인연으로 학문하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홍승기 정두희 이종욱(서강대), 이기동(동국대), 김두진(국민대), 김용선(한림대), 김수태(충남대), 신호철(충북대), 김당택(전남대), 노용필(덕성여대), 조인성(경희대) 교수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이기백 선생님은 진리와 도덕을 조화시키고 실천하는 선비였다”는 게 이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입력시간 : 2007/09/12 17:40:04 

[고전다시읽기] 민족을 진리보다 앞세워선 안돼/김기봉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28767.html (한겨레신문)
날짜: 2006.6.2

‘민족의 역사’로 환원하는 한국사는 세계사에서 고립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대안으로 ‘실증사학’ 제시
‘기억투쟁’인 동아시아 역사분쟁에선 한계
이제 ‘한국사학의 거인’ 어깨에 올라서서 보자

고전 다시읽기/이기백 <한국사 신론>

오늘 6월2일은 우리시대 최고 역사가로 칭송받는 이기백 선생 2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의 대표작 <한국사신론>은 1961년 <국사신론>으로 처음 출간됐다가 1967년 <한국사신론>(일조각)으로 개정 출판됐다. 그 후 계속 증보를 거치며 100만부 가까이 팔렸을뿐만 아니라, 영어·일본어·중국어·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돼 국제적으로도 대표적 한국사 개설서로 통용되고 있다. 서평 전문지 <출판저널>은 1999년 새 천년에 즈음해 전문가 추천을 받아 ‘21세기에도 남을 20세기의 빛나는 책들’을 뽑았는데, 국내서적으로는 <한국사신론>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이기백은 식민주의사학을 탈피해 한국사학의 과학성을 정립하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설정한 역사가다. 그는 식민주의사학을 한마디로 지리적 결정론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우리 주변의 중국·일본 등 강대국들에 의해 우리의 역사적 운명이 결정됐다는 타율성이론을 특징으로 한다. 강대국을 섬기며 사는게 우리 민족성이라는 이른바 사대주의는 이 같은 타율성이론에서 비롯했다. 그는 사대주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일본 식민주의사학의 발명품이라고 했다. 사대와 사대주의는 구별돼야 한다. 사대가 외교정책 또는 특정상황에서 발생하는 역사적 사실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사대주의는 그런 사대를 역사의 법칙이거나 사상 또는 민족성으로 치부하는 식민주의사학이 만든 이데올로기다.

대표적 한국사 개설서로 세계 통용

해방 후 한국사학의 제일과제는 식민주의사학의 허구성을 밝혀 한국사의 독자적 발전 가능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내재적 발전론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요청은 민족주의사학을 한국사학의 가장 지배적 흐름으로 만들었다. 이에 대해 이기백은 민족을 진리보다 앞선 가치로 해서는 한국사학의 과학성이 이룩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리를 배반한 민족은 역사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마침내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를 그의 묘비명으로 할 것을 유언했다. 그는 역사를 민족의 역사로 환원하는 국사에서 탈피해 ‘세계 속의 한국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평생 동안 기울였다. 그는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간 일본의 민족사학에 의해 식민주의사학이 만들어진 사실을 상기하면서, 민족사학과 식민주의사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주장했다.

민족사학-식민주의사학 동전 양면

 
<한국사신론> 여러 개정판들과 세계 각국 번역본(위). <한국사신론>은 1961년 처음 나온 뒤 세대를 초월하는 역사책으로 자리매김했다. ‘진리’란 가치를 중시했던 지은이 이기백 선생의 철학은 묘비명(아래)에 그대로 담겨 있다. 사진 일조각 제공

이기백이 지적했던 민족주의사학의 문제점은 한국사의 개별성을 특수성 내지는 고유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세계사적 보편성과의 연관성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사학은 “한국민족을 인류로부터 고립시키고 한국사를 세계사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이는 “결국은 민족의 우열론으로 기울어져서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자라나게 한 것과 같은 온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사학의 반대편에는 백남운으로 대표되는 사회경제사학이 있었다. 백남운은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법칙이라는 보편성에 입각해서 한국사를 이해했으며, 이러한 보편성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사연구의 기본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사회경제사>(1933)에서 유물사관의 도식에 입각해서 원시 씨족사회로부터 삼국시대 노예제사회, 신라통일기 이래 동양적 봉건사회 그리고 자기시대까지 이식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으로 한국사를 체계화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사적 보편법칙에 입각해서 일방적으로 한국사의 개체적 발전과정을 재단하는 것은 결코 역사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기백 선생의 주장이다.

그가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과학적 역사 연구방법론은 실증사학이다. 그는 실증사학을 과거의 사실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언뜻 보면 무질서하게 생각되는 객관적 사실들을 하나의 실에 꿰서 연결을 지어주는 작업, 즉 체계화 작업”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역사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역사로 서술돼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에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주도권을 쥐었던 지배세력이 누구였는가를 찾아내 그들을 중심으로 한국사의 전체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한국사신론>에서 신석기시대에는 씨족사회 구성원 전체가 지배세력이었다면, 신라시대에는 성골과 진골이란 골품이, 고려시대에는 호족이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그리고 마침내 근대에서는 민중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한국사 이야기의 플롯을 구성했다.

 
최고 역사가로 칭송받는 이기백 선생.

이런 한국사 체계화에 대한 비판은 그의 생전에 이미 제기됐다. 이에 대해 그는 평소 그답지 않게 겸손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구구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가 그러했듯이, 저자도 ‘10세기 뒤에 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라고 말했다. 그 말고 어떤 역사가가 천년 뒤에도 평가 받을 수 있는 한국사 통사를 썼다는 자부심을 피력할 수 있을까? 그는 <한국사신론>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일컬었으며, 천년동안 읽힐 고전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나와 같은 사학사 연구자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다. 난쟁이는 거인에 비할 바 없는 초라한 존재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서 거인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기백이 20세 한국사학의 거인이라면, 그의 모습이 큰 만큼 그가 남긴 그림자 또한 길다. 나는 21세기 한국사학을 위하여 2가지 이유에서 이기백 실증사학의 극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실증사학으로는 지금 우리가 국내외적으로 당면한 역사분쟁을 해결할 수 없다. 한국·일본·중국의 역사적 사실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 동아시아 역사학 현실이다. 일본 우익 역사교과서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고 우리가 아무리 시정을 요구해도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은 그것은 사실왜곡이 아니라 또 다른 역사해석이라는 것이다. 실증사학은 역사가가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만든다는 실제 작업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과거는 사라지고 없고, 남아 있는 것은 기억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분쟁은 사실과 해석의 관계라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기억투쟁, 곧 특정 과거를 누가 어떤 기억으로 전유해 역사로서 공인하느냐를 둘러싼 투쟁으로 전개된다. 이런 역사의 담론적 투쟁에서 과거와 역사가 일치해야 한다는 실증사학의 진리론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실증사학의 이런 한계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간으로 벌어졌던 역사의 내전에서도 그대로 재연됐다.

누구의 기억을 공인받느냐 관건

 
김기봉/경기대 교수·역사학

둘째, 21세기 한국사학은 망각된 역사공간인 동아시아를 재인식해야 한다. 식민지시대를 살았고 그 아픈 경험 속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식민주의사학 극복을 화두로 해서 한국사학의 독자적인 과학적 체계를 세우고자 했던 이기백은 동아시아사를 식민주의사학의 발로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도 그러해야 하는가? 페르낭 브로델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우리는 동아시아라는 감옥에서 살았으며 지금도 살고 있다. 이제는 지리적 결정론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를 ‘기억의 장(場)’으로 하는 한국사인식이 요청된다. 이는 브로델이 지중해를 무대로 해서 성찰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한계에 대한 탐색이며 우리의 역사적 운명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다. 우리는 이렇게 이기백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그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아야 한다.

서평자 추천 도서

『한국사신론』 이기백 지음 일조각 펴냄(1999), 1만5000원 (우리시대 최고의 한국사개론서)

『우리역사의 여러 모습』 이기백 지음 일조각 펴냄(1996), 9000원  (실감나게 읽을 수 있도록 분야별로 서술된 한국사)

『민족과 역사』 이기백 지음 일조각 펴냄(1971), 1만2000원 (이기백 역사학 정립을 위한 최초의 사론서)

신시내티공립도서관


지금은 없어진 건물인 것 같은 신시내티공립도서관 건물.
4층 내부가 통으로 서가로 만들어진 멋진 건물이네요…
1955년까지는 있었나 봅니다.


1. Main Library Entrance, 2. Main Library Entrance, 3. Main Library, 4. Art Room, Main Library, 5. Fiction Alcove, Main Library, 6. Newspaper Room, Main Library, 7. Main Hall, 8. Main Library, 1950s, 9. Main Hall

The Main Library has been downtown since 1874, when a new building was constructed at 629 Vine Street. According to library history, this building was considered “the most magnificent public library building in the country at the time.” The building closed in 1955.

It sort of makes me sick knowing this building could have been saved.

http://www.drew-o-rama.com/designcincinnati/2009/06/cincinnati-flickr-favorites-old-main-library.html